전체기사

'담배 피해보상' 못 받는 한국…"쓸쓸한 싸움, 여론몰이 부족"2020-11-26 04:32:02



[쿠키뉴스] 유수인 기자 =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낸 50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패소한 가운데 건보공단을 포함한 정부, 학계의 의지 부족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담배 대응 관련 전문가 진영을 재정비하지 않을 경우 암과 같은 중대한 질병이 생긴 국내 흡연자들이 회사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더 좁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성규 센터장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연세대 보건대학원 겸임교수, 전 국가금연지원센터장)은 25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자격이 되지 않는 공단이 쓸쓸한 싸움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 센터장은 “손해배상 청구의 주체는 공단이 언급한 3400여명의 국민인데 이번 소송은 이들의 의지가 아닌 구상권 개념의 대리 청구로 진행됐다”며 “하지만 환자에게 급여비를 지급하는 게 공단의 업무이다. 때문에 재판부도 공단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부장판사 홍기찬)는 건보공단이 케이티앤지(KT&G)와 한국 필립모리스, 브리티쉬아메리칸토바코(BAT)코리아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선고기일을 열고 공단 측의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의 결정에는 ▲직접적 피해 대상이 아니라는 점 ▲경고문구 표시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흡연을 선택했다는 점 ▲흡연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않는다는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재판부는 “원고(공단)가 급여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보험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급여비를 지출한 직접 피해자로서 손해배상을 구할 권리가 없다”며 “또 담배소비자는 자신의 좋아하는 맛이나 향을 가진 담배를 선택해 흡연하고, 이 사건의 질병이 개개인의 생활습관과 유전, 주변 환경, 직업적 특성 등 흡연 이외에 다른 요인들에 의해 발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대기오염, 스트레스 등 다양한 요인들이 폐암 발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어서 이 사건이 특이성 질환(특정 병인에 의해 발생하고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대응하는 질환)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이 센터장은 “재판부가 흡연-암발생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단이 제시한 3400여명이 오직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렸는지를 입증하라는 얘기”라며 “입증 책임은 공단에게 있지만 공단만 비판할 수 없다. 보건복지부와 학계, 시민단체는 중차대한 일을 공단에게만 맡긴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담배회사 편을 들어준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뒤엎으려면 엄청난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낼 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상대는 국내 1, 2, 3위 로펌”이라며 “공단이 소송비로 얼마를 썼을지 모르겠다. 정부가 지원해준 게 없다. 또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본업이 있는 가정의학과 의사들이고, 관련 시민단체는 물론 협의체 직원도 없다. 목숨 걸고 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부 전문가와 공단만 쓸쓸한 싸움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단도 지난 6년간 소송 과정에 대해 중간 중간 언급해주는 게 필요했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센터장은 한국 국민만 담배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사회적 인식전환을 위해 금연 전문가들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1998년 담배회사와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으며, 2017년 TV와 신문에 담배해악에 대한 사과광고를 내도록 담배회사에 명령한 바 있다.  

이 센터장은 “필립모리스의 경우 미국 정부에는 200조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내고 있다. (자회사라고 할지라도) 같은 회사인데 미국 국민으로 살면 손해배상을 받고 한국 국민으로 살면 못 받는 상황”이라며 “물론 미국에서도 합의에 이르는 과정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우리도 가야할 길이 멀겠지만, 이 싸움을 계속하려면 국민의 인식을 바꾸고 여론을 형성해 재판부를 압박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서 금연 진영에 전문가들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단은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분석한 빅데이터 자료를 토대로 담배로 인해 폐암 중 소세포암, 편평세포암 및 후두암 중 편평세포암 진료를 받은 수진자 3465명에게 지급한 533억원대의 급여를 담배회사가 물어내야 한다면서 지난 2014년 4월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를 위해 건보공단은 법무법인 ‘남산’을 소송대리인으로 지정, 공단소속 변호사들과 함께 변호인단을 꾸렸다. 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소송에 들어간 변호사 선임비는 1억3000만원, 인지대는 1억6000만원 정도다.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


1심 판결 직후 공단과 보건계, 시민단체는 이번 판결이 담배제품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근거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은 “그동안 건보공단이 담배 피해에 대해 법률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노력했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판결”이라면서 “아직은 담배로 인한 피해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부족한 것 같다. 앞으로도 공단은 항소 문제를 포함해 담배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홍관 한국금연운동협의회장은 “사법부는 국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취하는 담배회사의 편을 드는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그만두고, 담배회사에 책임을 묻는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라며 “담배의 위해성은 이미 많은 국가들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됐고, 미국을 비롯해 선진국들에서는 흡연피해자들을 대신해 주정부가 나서 담배회사들과의 소송을 통해 거액의 배상액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번 판결은 국제적인 추세에도 역행한다”고 꼬집었다. 

대한보건협회는 성명서를 내고 “흡연이 흡연자의 자주적 선택이라는 인식은 개인과 사회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관계성에 반하는 시대착오적 판단이다. 현재 담배회사는 건강위험에 관련된 성분정보를 일체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은폐하기에 급급해온 역사적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재판부의 책임있는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suin9271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