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필의 視線] 오키나와人의 태평양전쟁 응어리

[조한필의 視線] 오키나와人의 태평양전쟁 응어리

기사승인 2025-04-30 22:43:21
태평양전쟁 중 오키나와 사람들이 겪었던 참상을 자세히 전하고 있는 '항구평화' 기념물.  사진=조한필 기자

해외여행 하다보면 예상치 않게 마주치는 지역의 역사적 기념물들이 있다. 지난주 오키나와(沖縄)서도 그랬다. 패키지 코스로 갔던 해안가 일본의 신사(神祠). 큰 감흥이 없어 주위를 살피다가 참 의미있는 비석들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가 ‘대만 조난자의 묘’ 였다. 오키나와인이 대만서 조난을 당했다면 그곳에 무덤이 있어야지 왜 오키나와에 있을까.

여기에 일본의 근대 침략사가 숨어 있었다. 오키나와가 류큐(琉球)왕국이던 시절이다. 1871년 류큐인들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돌아오다가 대만에 표류했다. 이곳 원주민과의 오해로 표류한 류큐인 54명이 살해당했다.

그런데 1874년 일본 메이지 정부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대만을 침공했다. 일본에 편입(1879년)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나서 대만 보복전에 나선 것이다. 전투는 이겼지만 일본군 피해는 컸다. 말라리아 감염으로 500여 명이 병사했다. 그 때 조난자 유해를 거둬 와 류큐에 묻고 비석을 세운 거 였다.

우연히 들렀던 커피숍에서 재밌는 영화 홍보물을 접했다. 오는 6월 13일 오키나와서 우선 개봉하는 ‘나무 위의 군대’였다. 1945년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 때 살아남은 두 일본인 병사가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큰 나무 위에서 2년을 보낸 실화를 소재로 했다. 2년 전 한국서도 손석구 주연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진 바 있다. 이번에 영화로 처음 만들어졌다. 

오는 6월 13일 오키나와서 먼저 개봉되는 태평양전쟁 실화 영화 '나무 위의 군대' 포스터.  일본 본토에선 7월 25일 개봉된다.
대만 조난자의 묘 비석(왼쪽)과 전몰 신문인의 비.  사진=조한필 기자 

그러고 보니 오키나와 곳곳의 2차대전 참상을 전하는 비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미노우에 신사 해변가의 항구평화 기념물 제목이 ‘나구야케’는 사전에 나오지 않은 말이었다. 설명문에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서 오키나와인(人)이 어떤 희생을 겪었나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키나와 전투는 1931년 시작된 일중전쟁(만주사변) 이래 15년간 지속된 격전이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민들이 휘말려든 전쟁이었다. 1944년 10월 10일 공습에 의해 나하시는 잿더미가 되고, 이듬해 4월 미군 상륙 후 3개월 여에 걸친 전투의 치열함은 극에 달했다. 그 결과 나하시민 2만8000여 명과 오키나와 전체에서 23만여 명이 귀한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일본 본토와 비교할 수 없는 오키나와인의 피해를 강조한 후, 기념물을 세우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우리 나하시민은 전쟁의 참화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이 어리석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결의한다. 나하시민은 전후 50주년(1995년)을 맞아 전몰자들을 추모하고 나하시민의 항구평화에 대한 강한 결의를 아시아와 세계인에게 전하기 위해 여기에 기념물 ‘나구야케’을 건립했다. 나구야케는 온화함을 뜻하는 오키나와 옛말로 영원한 평화를 원하는 나하시민 기원을 담았다.”

또 부근에서 ‘전몰신문인의 비’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전쟁기간 죽음을 무릅쓰고 취재하다 목숨을 잃은 류큐신보 등의 36명 언론인을 기리고 있었다. 게 중엔 일본군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억울하게 처형된 이도 있다.

더욱 참혹한 전쟁 피해를 전하는 기념물이 있었다. 1944년 8월 22일 밤,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피난가던 민간인 1788명을 태운 쓰시마마루(対馬丸)호가 미 잠수함 어뢰에 침몰했다. 사망자 1484명 중 780명이 어린이였다. 미국의 해상 봉쇄작전에 따른 희생이었다. 5월 5일 어린이날(우리와 같음)을 앞두고 추모비 앞에 걸어놓은 잉어풍선(고이노보리)이 애처로움을 더했다. 잉어가 역경을 이기고 용이 된다는전설을 토대로 부모가 자녀의 건강,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물이다.

1944년 8월 오키나와 인근에서 미 잠수함에 의한 쓰시마마루 침몰 사건이 있었다. 이 곳은 그때 희생된 700여 명 어린이를 추모하고 있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달린 어린 희생자를 위한 잉어풍선이 달려있다.  사진=조한필 기자

숙박했던 호텔 로비에서 류큐신문 4월 24자를 볼 수 있었다. 문화면에서 한 지역교수 기고문 제목이 눈에 띄웠다. ‘오키나와인이 보여주는 현실, 몫 없는 자를 만들어 낸다.’ 내용인 즉 일본 본토에 대한 반발감을 나타내봤자 우리 몫만 얻지 못할 거라는 슬픈 얘기였다. 2차대전 당시 본토 일본인도 겪지 않았던 고초를 오키나와 사람들이 감수했다.  그 응어리가 아직 남아있음을 느꼈던 팩키지 여행이었다.
/천안·아산 선임기자



조한필 기자
chohp11@kukinews.com
조한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