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교장 연수에서 특강을 하며, ‘공존의 교육,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하는 상대방을 ‘악마’로 여겨선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악마에게도 천사 같은 면이, 천사에게도 악마 같은 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수녀 교장선생님께 “천사에게도 악마성이 있나요?”하고 짓궂게 물었다. 그 선생님이 ‘성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단호히 답하는 바람에 강의장은 한바탕 웃음에 휩싸였다.
‘천사 대 악마’의 정치가 지배하던 시절
전두환 독재 체제에 치열하게 맞서던 1980년대,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외치던 학생과 민중에게 군부정권은 진정한 ‘악마’였다. 반대로 민주화 운동 세력은 ‘천사’처럼 추앙받았다. 선악의 십자군 전쟁 같은 구도 속에서 ‘천사’가 때로는 과오를 저질러도(동양공전, 한양대 프락치 오인 구타 사망 사건 등) 민주주의라는 대의의 그들에 묻혔다. 진영 내의 사람들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그렇게 관용했다.
그렇게 치열한 시기로부터 30~40년이 지났다.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다. 군부정권은 물러났고, 1987년 민주항쟁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민주화 시대로 진입했다. 그 사이에 한때 ‘천사’처럼 여겨졌던 인사들이 ‘적(敵)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제도권 정치에 투신했다. 그 중에는 비리로 구속된 인사도 여럿 있었고, 국정 운영에 참여하며 과거 자신들이 비판하던 독재 정권의 행태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른바 ‘내로남불’ 공방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세상은 이토록 변화하였는데,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과거의 ‘선-악 이분법’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 갈등의 성격은 전과 같지 않다. 물론 ‘12.3’은 많은 사람에게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그 치열한 선악구도를 상기시키기도 했지만, 모든 현실을 ‘천사와 악마의 대립’으로 읽으면 현실과 불일치가 발생하고, 중간 지대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트럼프식 ‘적대적 진영 정치’가 확산할수록 이 괴리감은 더욱 커진다. 분명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여당이 된 민주당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고문과 혼수를 동시에 걱정한 ‘평범한 악’
민청련 초대 의장을 지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회고록에는 그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했던 처참한 고문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아프면서도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던 김근태 의장의 몸에 한 발을 올려놓은 채, 아내와 통화를 하며 곧 결혼할 딸의 혼수를 걱정하는 고문 기술자의 모습이 그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명명한, 사유의 부재가 낳은 끔찍한 평범함이다. 인간에게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그렇다.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제 5만5000여명이 넘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사망할 정도로 극한에 치달았다. 이스라엘은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2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간직한 나라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제 팔레스타인을 향해 홀로코스트에 버금가는 군사작전을 펼친다. 악의 평범성에 더해 ‘악의 보편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3-7제 사고’ : 상대 안의 30%를 보라
나는 늘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3-7제 사고’를 제안해 왔다. 상대의 7할이 틀리더라도 3할은 옳은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를 놓고 그 위에서 생각하자는 뜻이다. 적대적 상대방이 가진 30%의 옳은 지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성찰의 공간이 열린다. 우리가 가진 70%의 정의를 추구하되, 상대의 30%를 녹여내는 정치·운동·행정을 펼칠 때, 갈등은 소모적 전쟁이 아닌 창조적 경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치열하고, 때로는 적대적으로 갈등하더라도 30%의 공통분모만큼은 만들어내고 또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오늘날의 정치처럼 극단성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지닌 채로 경쟁하고 승패를 겨루자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책 『부족국가 대한민국』에서 ‘소속감이 강할수록 폭력과 적대가 심해진다’고 지적했다. 적의 독선과 아집은 거울 속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3-7제 사고는 이 거울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 70%의 확신으로 싸우기
우리는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격변의 시기를 겪어왔다. 그 시기는 너무나도 엄혹했기에, 진정 ‘천사와 악마의 대결’처럼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다. 독재 세력도, 그에 맞서던 반독재 민주화 세력도 모두 인간의 허물을 지닌 존재다. 광적인 선악 구도는 민주화의 불가피한 산물이었지만,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옛 도구가 되었다. 기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죄인으로서 자신의 정의를 추구하되, 100%가 아닌 70%의 확신을 갖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정치가 취할 윤리적 긴장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투쟁 이후 패자의 ‘삼족(三族)을 멸(滅)’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선거를 통해 평화롭게 정권이 교체되는 문명화가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승자와 패자 모두를 영원할 수 없는 한시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선거 국면에는 투쟁하고 갈등하며 격정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70%의 확신과 30%의 인정으로 새로운 ‘공존의 사회’를 꿈꿔 보기를 바란다. 새 정부뿐 아니라, 국가적 혼란을 초래했던 야당 역시 겸허한 자세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들이며 극단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민주에서 ‘민주-공화’로, 극단에서 공존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제1항에 적힌 문장이다. 지난 40여 년 간 우리는 ‘민주’에 몰두해 왔다. 그 과정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공동선을 모색하는 태도로서의 ‘공화’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전 지구적인 ‘적대적 진영 정치’를 넘어서는 길은 헌법이 명시한 공화적 가치를 주목하는 것이다.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상대 안에 있을지 모를 30%의 옳음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도 악마성이 있을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 위에서 비로소 민주정치는 ‘민주-공화 정치’로 나아갈 수 있고, ‘공존의 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끝
6개월에 걸친 ‘조희연의 공존사다리’를 이번 글로 마칩니다. 쿠키뉴스에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평화가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