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기능식품은 보통 인터넷을 통해 사죠. 일반 매장에서 구입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진열된 게 어떤 제품인지, 또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도 모르니까요.”
약국,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일반의약품에 이어 식품 포장지 등에도 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도입하도록 했지만, 적용 여부를 재량에 맡겨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의약품에 제시한 점자 표시 가이드라인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을 합친 전체 4만4751개 의약품 중 점자 표기가 돼 있는 의약품은 96개에 불과했다. 건강기능식품의 경우 같은 해 10월 한국건강기능식품협회가 업계에 점자 표시 현황 조사를 요청했지만, 데이터가 충분치 않아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16일, 기자가 찾은 서울의 한 드러그스토어 매장만 해도 50여종의 건강기능식품이 진열돼 있었지만 점자 표기 제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건기식 제품 용기는 대개 플라스틱 재질을 썼으며, 모양이나 크기마저 비슷했다.
시각장애인 박지영(가명) 씨(41세)는 “유튜브 같은 동영상 공유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매장에서는 직원에게 일일이 설명을 부탁해야 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검색 한 번으로 이 같은 번거로움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오프라인 제품에서 상세한 성분 설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면서 “제품 이름만이라도 겉면에 점자로 넣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건기식에 비하면 의약품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편의점에 구비되는 소화제, 해열제, 파스, 연고 등을 중심으로 점자 표기가 이뤄지고 있다. 2021년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안전상비의약품과 식약처장이 정한 의약품에 대해 제약사들이 점자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안양시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한 약사는 “시각장애인에게 점자가 표기된 의약품을 권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품목 제한이 크고 복약지도에 애를 먹기도 한다”라며 “의약품이 담긴 상자를 종류에 따라 일부러 자르거나 접어서 환자가 손으로 만져 구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전했다.
식품 점자 적용 여부는 ‘재량’…“제품 고르고 살 수 있는 날 까마득”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의약품에 이어 식품, 의료기기 포장지에도 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도입하도록 하는 법안이 개정 공포됐다. 의료기기는 점자 도입을 ‘권장’하고, 식품은 ‘재량’에 따라 점자를 표기한다. 식품은 6개월, 의료기기는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시행할 예정이다.
시각장애인 김수형(가명) 씨(33세)는 “식품의 경우 표기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는 셈이다. 정부가 건기식에 점자 표기를 적용하기 위해 이미 2021년부터 소비자단체, 장애인단체 등과 많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체감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점자 표기 제품이 없으니 매장에 갈 이유가 없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식품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뤄졌던 의약품에 대한 점자 표기도 제대로 마침표를 찍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데, 장애인이 매장에 가서 건기식 같은 제품을 고르고 살 수 있는 날은 까마득해 보인다”고 말했다.
최선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장은 “의약품이나 의약외품은 의무화되기 때문에 결국 도입이 무난하겠지만 식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나 소비자원에서 열심히 홍보하지 않으면 반영이 미비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건기식 같은 경우 건강과 직결되는 부분이 있다. 업계에서도 이를 고려해 적극 점자를 도입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가이드라인 보완 촉구 잇따르는 ‘표기 의무화’ 의약품
내년 7월부터 점자 표기가 의무화되는 의약품에 대해서는 남은 기간 표기 작업이 제대로 전개될 수 있도록 정부 가이드라인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장애인의 불편을 고려해 장애인단체에 점자 디자인 검토를 요청한 사례도 있었다”며 “업계 대응에 비해서도 정부의 발걸음이 뒤처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안전상비약 외에는 점자 표기 대상 의약품이 확정되지 않았다. 내년 7월 시행을 감안하면 준비기간이 촉박할 수 있다”며 “정제나 캡슐 외에 점안제 등이 대상이 될 경우 표시면이 넓지 않아 가이드라인 요구대로 구현이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제약업계 관계자는 “점자 표기까지 반영 가능한 공장 자체가 많지 않다. 표기가 가능한 업체와 별도 계약이 필요할 수 있는데, 생산비 부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현재 가이드라인 기준도 애매해서 찍어낸 점자 표기가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수정하고 다시 만들어 생산하자면 손해가 막대하다. 정부는 명료한 가이드라인을 서둘러 제공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천상미 중도시각장애인재활지원센터 담당자는 “제약업계는 식약처 가이드라인 규정에 맞춰 점자를 찍어내고 있지만 점자의 높이가 낮아 장애인이 촉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규격 또한 너무 가깝거나 멀어 읽어내기 쉽지 않은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포장지 점자 표기만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쉽다”면서 “‘음성·수어 변환용 코드’를 적용한 의약품을 적극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당 코드는 의약품 포장에 부착된 바코드를 휴대폰 카메라로 스캔해 이용할 수 있다. 의약품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음성과 수어 영상으로 제공한다.
정부는 점자, 음성·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 표기를 위해 여러 단체와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약계, 장애인단체 등을 아우르는 ‘장애인 의약품안전사용정책협의체’를 운영 중”이라며 “실사용자 중심의 안전 정보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