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 업계에 따르면 임상시험 증가와 규제 심사 효율화가 맞물리면서 국내 기업이 독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중국 기업과 나누는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이 단순한 의약품 판매시장을 넘어 글로벌 신약 개발의 주요 거점으로 부상한 것이다.
글로벌 정보분석기관 클라리베이트는 ‘2026 블록버스터 신약 보고서’를 통해 중국을 제조 기반 국가에서 혁신 강국으로 변모하는 전환점에 들어선 시장으로 평가했다. 중국의 비만·암환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빅파마들은 세계 최대 규모 의약품 수요처로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1월 제약바이오 시장 대형 거래 중 다수는 중국 바이오텍과 파트너십 형태로 체결됐다. 바이오월드 집계 기준 전체 거래 규모는 311억6000만달러(약 45조원)로, 최근 8년 중 가장 높은 1월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중국 내 임상시험은 2020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서 등록된 의약품 임상시험은 총 5215건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신약 임상시험은 2997건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전년 대비 증가율은 18%에 달했다. 혁신 신약 중에선 37.5%가 항암제 개발에 집중됐다.
중국 규제당국도 혁신 신약의 개발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심사 체계를 개편하고 있다. NMPA는 지난해 10월 국가 중점 연구개발 과제와 국제 다기관 임상시험 등을 지원하기 위해 일정 요건을 충족한 혁신 신약의 임상시험계획(IND)을 30일 안에 심사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수익성 없는 기술 스타트업의 상장을 지원하기 위한 상장 제도도 개편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바이오 산업에 투입한 자금은 300억위안(약 5조8000억원)에 달한다.

박 연구원은 “중국의 완화적인 통화정책과 낮은 금리 환경도 연구개발 비중이 높은 바이오 기업들의 자금조달 부담을 완화하고, 장기 성장 산업에 대한 투자심리 개선을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변화는 혁신신약의 상업화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 회수 기간을 단축시키며 중국 바이오 산업의 연구개발 선순환 구조를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짚었다.
한중 제약바이오 기업 협력 확대
방대한 환자와 임상시험 기관, 상대적으로 빠른 환자 모집 속도를 갖춘 중국이 초기 임상 데이터를 신속하게 확보할 수 있는 시장으로 자리 잡으며 한중 기업의 협력도 단순 판권 계약을 넘어 임상 개발과 허가, 상업화로 이어지고 있다.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는 중국 포순제약과 항체약물접합체(ADC) 후보물질 ‘LCB14’를 개발하고 있다. 포순제약은 중국에서 HER2(인간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2) 양성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기존 치료제와 비교하는 임상 3상을 비롯해 여러 고형암 임상을 진행해 왔다. LCB14는 리가켐바이오의 주요 파이프라인 중 가장 상업화에 가까운 파이프라인으로 꼽힌다.
HK이노엔과 중국 뤄신제약의 협업은 현지 사업화까지 이어진 사례다. 뤄신제약은 지난 2015년과 2021년 HK이노엔으로부터 위식도역류질환 신약 ‘케이캡’(성분명 테고프라잔, 중국명 타이신짠) 정제와 주사제형 라이선스인 권리를 모두 확보했다. 국내 기업이 개발한 신약에 중국 기업의 임상·인허가 역량과 영업망을 결합한 모델로, HK이노엔은 뤄신제약의 타이신짠 판매 확대 영향으로 로열티 수익이 증가했다. 뤄신제약이 테고프라잔 주사제 개발에 속도를 내며 중국 P-CAB(칼륨 경쟁적 위산분비 억제제) 시장에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모습이어서 중국 내 시장 대응력이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첫 해외 연구개발 거점으로 중국을 선택한 곳도 있다. 지난달 말 삼성에피스홀딩스는 중국 베이징 창핑구에서 ‘중국 R&D센터’를 열고 연구개발 활동에 들어갔다. 중국 R&D센터는 ADC를 중심으로 기술 플랫폼을 확보하고, 신약 개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현장 특화형 조직이다. 센터가 들어선 베이징시 창핑구에는 바이오 첨단기술 산업단지인 ‘중관춘 생명과학원’이 위치해 있다.
지난해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중국 바이오텍인 프론트라인 바이오파마와 ADC 후보물질 공동개발 협력을 맺고 파이프라인 2종의 공동개발권과 페이로드 1건에 대한 독점 라이선스를 확보한 바 있다.
협력 방식 다양화…‘뉴코’ 모델 주목
업계에선 앞으로 협력 방식이 기술이전 중심에서 공동연구와 개발, 합작회사 설립 등으로 다양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기업이 보유한 초기 후보물질과 임상 실행력을 국내 기업의 제조·품질 관리, 글로벌 인허가 경험과 결합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의 자본을 연결한 신설법인, 이른바 ‘뉴코’ 모델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뉴코는 특정 플랫폼이나 파이프라인을 중심으로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자의 자금을 받아 설립된다. 핵심 자산에만 역량을 집중해 임상적 개념증명(PoC)을 빠르게 확보하고,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구조를 갖췄다. 중국의 후보물질을 국내 기업이 글로벌 기준에 맞춰 개발한 뒤 다국적 제약사에 기술이전하는 삼각 협력 구조인 셈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최근 ‘한중 바이오 협력의 기회와 대응 방향’ 보고서를 통해 제약바이오 산업에서 중국을 단순한 경쟁자나 위험 요인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고 진단했다. KISTEP은 중국의 대규모 임상 인프라와 제조 확장성, 한국의 바이오의약품 품질·생산 역량, 디지털헬스 기술, 글로벌 규제 대응 경험을 결합하면 상호보완적인 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협력 가능 분야로는 제약바이오를 비롯해 인공지능(AI) 의료, 뷰티바이오 등 6개 분야를 제시했다.

한중 관계의 복원 흐름도 산업 협력에 힘을 싣고 있다. 양국은 지난해 11월 정상회담에서 민생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1월 베이징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도 저출산·고령화 대응을 위한 실버산업과 의료, 바이오, 의약품 분야의 협력을 모색하기로 했다.
위험 요인도 여전…미국 견제 강화 변수
다만 중국과의 협력이 곧바로 글로벌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생산한 임상 데이터가 FDA나 유럽의약품청(EMA) 심사에서 어느 범위까지 인정될지도 사전에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전체 정보나 인체 유래 검체처럼 국가안보와 개인정보 보호 문제가 얽힌 분야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기술 유출과 지식재산권 침해, 임상 데이터 통제권 등 위험 요인이 여전한 만큼 협력 분야와 방식을 선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윤희정 KISTEP 바이오혁신전략팀장은 “중국과의 산업적 접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되 글로벌 바이오 공급망 재편 속에서 우리나라의 전략적 자율성과 신뢰 기반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협력을 설계해야 한다”고 짚었다.
미국의 중국 기업 견제도 변수다. 미국 하원 중국특별위원회는 최근 화이자, 머크, BMS(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 애브비, 일라이 릴리 등 미국 주요 제약사 5곳을 대상으로 중국 내 임상시험과 중국 기업과의 협력 현황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는 중국 임상시험 과정에서 생성되는 데이터와 기술 협력이 미국의 국가안보 및 바이오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 군병원에서 수행된 임상시험 자료를 오는 17일까지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다만 중국 바이오텍이 자체 수행한 뒤 미국 기업에 라이선스한 초기 임상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번 조사는 미국이 지난해부터 추진한 ‘생물보안법’과 맥락을 같이한다. 미국은 바이오 기술을 반도체, AI와 함께 국가 전략기술로 규정하며 중국 바이오 기업의 미국 정부 사업 참여를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확보한 임상 데이터와 중국 기업과의 라이선스 계약 이력이 향후 미국 시장 진출과 규제 심사 과정에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지훈 KB증권 연구원은 리포트를 통해 “중국 내 임상의 유인은 미국 대비 2~5배 빠른 환자 모집과 낮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리스크 대응 비용이 이를 상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며 “FDA의 중국 임상 데이터 수용을 제한하는 법안과 자국 임상 유치 정책이 병행되는 가운데 초기 임상이 한국, 호주 등 중국 외 지역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