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인실리코 ‘갤럭스’는 어디쯤 왔나
미국 휴먼 롱제비티, 노화 연구용 AI 개발 위해 인실리코 메디슨과 손잡아
AI 신약개발, 약 하나 찾기 넘어 노화와 건강 전체를 학습하는 단계로
국내 갤럭스, 국제 무대서 기술력 검증… 대형사 협력과 자체 신약으로 영역 확장
기사승인 2026-06-08 08:01:03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에서는 매일같이 대형 M&A, 신약 허가, 임상 데이터가 쏟아진다. 그런데 이 이슈들이 국내 시장 및 관련 업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짚어주는 보도는 많지 않다. [글로벌 트렌드로 읽는 K-제약바이오]는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의 주요 흐름을 추적하고, 그 안에서 국내 시장 및 기업의 좌표를 찾아본다. 편집자 주
인공지능(AI)이 신약을 찾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노화 자체를 연구하는 도구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 휴먼 롱제비티(Human Longevity)는 노화와 건강을 학습하는 AI를 만들기 위해 새 회사를 세우고, AI 신약개발 기업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과 손을 잡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계약 규모와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챗GPT가 방대한 글을 학습해 사람처럼 말하듯, 이번 AI는 방대한 건강 데이터를 학습해 인간의 노화와 질병을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약을 만든 뒤 병을 치료하는 방식이 아니라,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예측하고 막겠다는 구상이다.
노화를 학습하는 AI, 어떻게 만드나
이 AI의 바탕은 휴먼 롱제비티가 10여 년간 모아온 건강 데이터다. 유전 정보부터 영상 검사, 진료 기록, 오랜 기간 추적한 건강 상태까지 담겨 있다. 여기에 인실리코 메디슨의 AI 기술을 더해 노화의 원리를 분석하고 질병 위험을 미리 가려내는 것이 목표다. 개인의 민감한 의료 정보는 한곳에 모으지 않고 원래 보관처에 그대로 둔 채 학습시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한다고 알려졌다.
휴먼 롱제비티는 2013년 미국에서 세워졌다. 인간 게놈(유전체) 해독을 이끈 과학자들이 창업에 참여해 일찍부터 주목받은 회사로 전해진다. 손잡은 상대는 AI로 신약 후보를 찾는 분야에서 이름을 쌓아온 기업으로, 지난해 12월 홍콩 증시에 상장했다. 시장은 이번 협력을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사는 데서 생기는 ‘장수 시장’을 겨냥한 장기 투자로 본다. UBS는 이 시장이 2030년 약 8조 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판 인실리코 ‘갤럭스’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같은 흐름은 한국에서도 보인다. AI 신약개발 기업 갤럭스가 대표적이다. 서울대 화학과 석차옥 교수가 2020년 세운 회사로, 단백질의 구조를 컴퓨터로 예측하고 설계하는 기술을 20년 넘게 다뤄온 연구진이 모였다. 자연에 있는 단백질을 본떠 약을 만들던 기존 방식과 달리, 새로운 단백질을 처음부터 그려내는 AI 기술을 앞세운다. 단백질 구조 예측을 겨루는 국제 대회에서 상위권에 오르며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갤럭스를 ‘한국판 인실리코’라 부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실리코 메디슨은 과학자들이 세운 회사가 자체 AI로 신약 후보를 찾고, 그 기술을 외부 협력과 자체 신약 개발로 넓혀 끝내 증시에 오른 사례다. 갤럭스도 같은 길을 걷는다. 대학 연구실에서 출발해 독자적인 단백질 설계 AI를 갖췄고, 국내외 기업과 손잡으며 자체 신약까지 함께 끌고 간다. 인실리코 메디슨이 이미 증시에 올랐다면, 갤럭스는 2026년 상장을 준비하며 그 뒤를 잇는다.
기술의 현재 위치도 가늠해볼 수 있다. 자체 기준으로는 항체를 원하는 표적에 달라붙게 설계하는 성공률이 10% 안팎으로, 글로벌 평균(0.01% 수준)을 웃돈다고 제시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구글도 비슷한 단백질 설계 AI를 선보였지만 항체 설계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술은 협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GC녹십자, 셀트리온과 각각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를 함께 개발하기로 했고, 지난 5월 28일에는 항체 기반 항암제 전문기업 에임드바이오와도 손을 잡았다. 두 곳은 뇌 질환 치료의 큰 걸림돌인 ‘혈액뇌장벽’을 함께 풀기로 했다. 혈액뇌장벽은 해로운 물질이 뇌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보호벽인데, 치료 약물까지 가로막아 약이 뇌에 닿기 어렵게 한다. 이 벽을 통과하는 단백질을 설계하는 일이 핵심 역할이다.
자체 신약 개발도 병행한다. 항암 후보 가운데 일부에서 가능성 있는 물질을 확보했고, 임상 시험 진입을 목표로 연구를 이어가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까지 약 680억원을 투자 받았다. 석 대표는 신약개발에서 AI가 보조 도구를 넘어 ‘바탕이 되는 큰 모델’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여러 차례 밝혀온 것으로 전해진다. 장수과학에 뛰어든 글로벌 AI가 가려는 방향과 맞닿는 대목이다.
정리하면 기술력은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았고, 안팎의 협력과 자체 신약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단계다. 약 하나를 빨리 찾는 경쟁은 이제 건강 데이터와 AI를 누가 더 두텁게 쌓느냐의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2030년 8조 달러로 커질 장수 시장을 앞에 두고, AI로 단백질을 설계하는 한국 기업이 세계 무대에서 어느 자리에 설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