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사제·국립의전원 등 ‘지필공’ 강화
분만기관 감소, 필수의료 인력 수도권 집중
“단편 대응 넘어 분명한 문제의식과 방향성 필요”
기사승인 2026-06-02 06:00:05
보건복지부는 돌봄 국가책임 강화, 기본생활 안전망 구축,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 K-바이오헬스 육성 등을 주요 정책 목표로 내세웠다. 이재명 정부 출범 1년, 주요 보건복지 정책이 구호를 넘어 국민 체감과 실행 단계에 들어섰는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박효상 기자윤석열 정부가 퇴장하며 넘긴 의료개혁의 바통이 이재명 정부로 넘어가 ‘의료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변화가 체감되지 않는다는 게 임상 현장의 평가다. 이미 무너진 지역·필수의료 체계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정부가 명확한 정책 실행 의지를 갖고 세밀한 설계와 과감한 투자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보건복지부는 오는 4일 이재명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지역·필수·공공의료 기반 구축을 보건복지 분야 핵심 성과로 꼽았다. 이른바 ‘지필공’ 강화를 위한 핵심 제도는 의과대학 지역의사 선발전형 확대와 지역의대 설립이다.
정부는 ‘지역의사법’ 제정을 통해 오는 2027년부터 2031년까지 총 2942명을 지역의사 선발전형으로 선발할 계획이다. 해당 전형으로 선발된 학생은 등록금과 교재비, 주거비 등을 지원받고 의사 면허 취득 후 10년간 의무복무지역에서 근무하게 된다.
국립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의 법적 기반도 마련돼 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면허를 받으면 공공의료 분야에 15년간 의무복무 해야 한다. 복지부 장관은 의무복무 의사의 전문과목을 직접 지정할 수 있으며, 정부는 오는 2030년 국립의전원을 개교해 매년 100명의 학생을 선발할 방침이다.
이 같은 정부의 정책 추진 배경에는 지역의료의 어려움이 자리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4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의사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에도 지역 간 인력 분포 차이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수도권과 대도시에 의료 인력이 집중되면서 농어촌과 중소도시는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다는 진단이다. 지난 2024년 기준 서울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4.67명 수준인 반면 울산(2.52명), 강원(2.58명), 경남(2.57명) 등 일부 비수도권 지역은 2.5명 수준에 그쳤다. 한 나라 안에서 두 배 가까운 격차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구 1000명당 필수의료 전문의 수만 놓고 보면 격차는 4배에 달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국민중심 의료개혁 추진방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수도권의 인구 1000명당 필수의료 전문의 수는 평균 1.86명이었지만, 비수도권 평균은 약 4분의 1 수준인 0.46명에 그쳤다. 이는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응급의학과·심장혈관흉부외과·신경과·신경외과 등 8개 필수과목 전문의 수를 지역 인구 규모를 고려해 비교한 것이다. 시도별로 보면 서울이 3.02명으로 가장 많았고, 광주·경북(각 0.36명), 대전·전북(각 0.34명), 충남(0.31명), 전남(0.29명) 등이었다.
열악한 지역의료…피해는 환자들에게
녹록치 않은 지역의료 상황은 곧 환자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35세 이상 고령 산모와 조산아 등 고위험 분만은 증가하는 반면 전문인력은 부족해 고위험·응급 임산부가 제때 진료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최근엔 청주의 한 산모가 응급 분만할 병원을 찾지 못해 29주차 태아가 숨지는 일이 있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수술실 안으로 의료진이 들어가고 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정부는 전원전담팀 인력을 3배 늘리고, 여러 병원에 동시에 전원을 요청할 수 있는 정보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모자의료 전원·이송체계 손질에 나섰지만, 현장은 이미 붕괴된 산과 의료체계를 회복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달 26일 입장문을 통해 “이번 발표는 이미 수년 전 시행됐어야 할 대책”이라며 “무너진 분만 인프라와 산부인과 의료 현장 현실을 고려하면 실제 효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고위험 임신 위험이 증가하자 분만의료 기피 양상은 뚜렷해졌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 따르면, 지난 2013년 706곳이던 분만 의료기관은 2024년 425곳으로 40% 감소했다. 전국 250개 시·군·구 중 분만기관이 단 한 곳만 남은 지역은 60곳(24.0%), 하나도 없는 지역은 77곳(30.8%)으로 나타났다.
산과 의료체계 붕괴는 의료사고 처벌 공포에서 비롯됐다. 서울의대 산부인과 교수와 전공의가 수년 전 자연분만으로 받은 아이가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 불구속 기소됐다는 사실이 지난해 9월 알려지면서 파장이 일기도 했다.
복지부는 의료진의 법적 부담 완화책을 펴고 있다. 지난해부터 분만 등 필수의료 전문의를 대상으로 고액 배상 보험료를 지원해 의료사고 발생 시 최대 17억원까지 배상액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달부터는 산과뿐 아니라 응급실과 신생아중환자실 전문의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한다. 불가항력적 분만사고에 대한 국가 보상도 강화된다. 기존에는 신생아 뇌성마비·사망, 산모 사망 등에 대해 보상했지만, 산모에게 중증 장애가 발생한 경우에도 최대 1억50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필수의료 위기…“대통령 명확한 문제의식 안 보여”
이재명 정부가 윤석열 정부와 다른 점으로는 ‘소통’이 꼽힌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5월6일 자신의 SNS에 “당사자 의견이 반영되고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필수의료 정책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국민참여형 의료개혁 공론화위원회’ 출범을 약속했다.
정기현 의료혁신위원회 위원장이 2월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차 의료혁신위원회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현재는 25명의 민간위원과 3명의 정부위원으로 구성된 ‘의료혁신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의료개혁의 대원칙과 방향을 의료계와 합의하고, 세부 정책은 투명한 공론의 장을 거쳐 추진한다는 방침 아래에 출범한 것이다. 지역·필수의료 소생 해법을 300명의 국민에게서 듣기 위해 시민패널도 모집한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의대 정원을 의사와 협상해서 결정하는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며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정부 발표 한 달 만에 전공의가 집단 이탈하면서 대형병원이 마비됐다. 의대 교수들은 사직을 결의했으며, 수업을 거부하는 의대생이 줄을 이었다. 급격히 번진 의료 현장의 혼란으로 인해 환자들의 피해가 속출했고, 정부는 비상진료체계를 가동했다.
의료진은 숙의에 기반한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실용적이고 현장에 와닿는 정책인지에 대해선 의문을 표했다. 강희경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전문과목별 미래 필요 의사 수 추계, 한국형 전공의 수련평가원(K-ACGME) 설립, 의료분쟁 법적 부담 완화 등은 바람직한 움직임으로 보인다”면서도 “얼마나 많이 검사하고 시술했는가 대신 대상 환자군이 얼마나 더 건강해졌는가에 대해 보상하는 지불체계 개선과 이를 위한 의뢰·회송기관 간 공동체 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으나, 수도권에서도 상급종합병원의 젊은 실력 있는 바이탈과 의사들이 급속히 떠나고 있다”면서 “바이탈과 의사들이 과목별로 한 병원에 모여 당직과 응급 대응, 수련을 제공할 수 있는 권역별·과목별·질환별 센터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부 출범 1년 차를 맞았지만, 현장에선 별다른 변화를 찾을 수 없다는 쓴소리도 나왔다. 황규석 서울특별시의사회 회장은 “전 정부와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되묻고 싶은 상황”이라며 “인기영합적인 정책만 내세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료제도 전반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일이다”라고 짚었다.
후배 의사 양성에 대한 걱정도 있다. 박종훈 고려대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이미 중증질환 영역은 후학이 끊긴 지 오래다. 그나마 현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며 “응급 상황에서 지방은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는 게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역·필수의료 위기에 대한 이 대통령의 명확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내용은 황당한 부분이 많았지만, 적어도 뭔가를 하겠다는 명확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물론 그 해법이 적절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필수의료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며 “그러나 지난 1년간 현 정부의 의료정책을 떠올리면 무엇이 있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나마 언급되는 것이 지방의대 신설 정도인데 그것 역시 왜 필요한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어떤 로드맵으로 추진할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문제 인식이 분명하지 않으니 정책도 근본으로 가지 못한다. 응급실 미수용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마다 ‘시정하라’는 식의 대책만 나오는 수준”이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단편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료 시스템 전체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과 방향성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