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맥락에서 첨단 장비가 없는 환자의 안방이나 요양원의 침상 곁에서 혈압을 재고 약을 조절하며, 때로는 그저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노인의학이나 재택의료의 실천은 화려한 메스를 쥔 의사들의 눈에 상대적으로 단순하거나 심지어 ‘하찮은’ 의료 행위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장기를 객체화하고 질병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패러다임 속에서 노쇠(frailty)와 다약제 복용(polypharmacy)을 관리하는 과정은 영웅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학적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은 그의 저서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에서 19세기 과학사에서 일어난 거대한 인식론적 단절을 설명합니다. 과거의 과학이 모든 사건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엄격한 결정론(determinism)‘에 지배받았다면, 이후의 과학은 우연(chance)과 확률을 단지 무지의 소관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즉, 개별 사건의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전체 집단과 시스템의 경향성을 읽어내는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이 새로운 과학적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노인의학과 재택의료의 본질은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습니다.
기계의 의학에서 복잡계의 의학으로
젊고 건강한 환자의 급성기 질환은 인과관계가 뚜렷한 결정론적 세계에 가깝습니다. A라는 세균이 감염을 일으키면 B라는 항생제를 투여해 C라는 완치 결과를 얻습니다. 여기서는 환원주의적 진단과 치료가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80대 이상의 노인 환자, 특히 재택의료의 대상이 되는 환자들의 신체는 결정론이 작동하지 않는 고도의 ‘복잡계(complex system)’입니다.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투여한 항생제가 장내 미생물총을 교란해 심각한 설사를 유발하고, 이로 인한 탈수가 섬망을 일으키며, 섬망으로 인한 낙상이 고관절 골절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붕괴가 일어납니다. 하나의 장기를 고치려는 선형적인 개입이 다른 장기의 예상치 못한 실패로 이어지는, 우연과 불확실성의 세계입니다.
우연을 길들이는 의학적 실천
이 불확실성 앞에서 노인의학을 실천하는 의사들은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언 해킹이 말한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을 임상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루는 전문가들입니다.
재택의료 현장에서 의사는 단순히 질병 코드를 보는 것을 넘어 환자의 거주 환경, 돌봄 제공자의 역량, 영양 상태, 인지 기능의 저하 속도 등 수많은 변수(우연)를 평가합니다. 하나의 질환을 완벽히 치료하려는 강박을 버리는 대신, 여러 만성질환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 가장 치명적인 기능 저하(catastrophic decline)가 발생할 확률을 통계적으로 예측하고 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길들이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뇌신경계의 비가역적인 퇴행을 관리할 때 단번의 수술적 완치보다 환자의 남은 기능과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미세한 조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원인을 도려내는 수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을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인지적 노동과 철학적 결단을 요구하는 과학적 실천입니다.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을 향하여
결정론적 의학에 익숙한 의사들은 질환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노인 환자의 상태를 의학의 실패로 간주하거나 흥미를 잃기 쉽습니다. 인체를 객체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궁극적으로 기계가 아니며, 노화와 죽음이라는 비가역적 엔트로피의 증가는 결코 메스로 완전히 잘라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첨단 시술과 수술이 의학의 ‘전부’라는 착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노인의학과 재택의료는 현대의학이 포기한 자투리 영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19세기의 기계론적 인체관을 넘어 21세기의 복잡성과 확률, 통계적 통찰을 다루는 의학의 새로운 진화 형태입니다.
통제된 수술실의 무균 상태를 벗어나 환자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어수선한 방 안에서 불확실한 우연들과 씨름하며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재택의료 의사들의 청진기. 그 끝에는 인체를 파편화된 객체가 아닌 하나의 소우주로 온전히 바라보는 가장 현대적이고 성숙한 형태의 과학이 맥동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진정한 완성은 생명을 기계처럼 수리하는 것을 넘어 쇠락해 가는 생명의 복잡성을 경외하고, 그 우연을 기꺼이 함께 길들여 나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