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강 이사장이 마주한 현황은 어느 때보다 거칠다. 고령화와 고가 의약품 도입으로 건강보험 지출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필수의료 보상 강화와 보장성 확대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보험료를 부담하는 가입자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합돌봄의 안정적 정착과 과잉 비급여 관리까지 이끌어야 한다. 강 이사장이 복잡하게 얽힌 ‘건강보험의 난제’를 어떤 해법으로 풀어갈지 주목된다.
21일 건보공단에 따르면 강 이사장은 지난 20일 제11대 건보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오는 2029년 7월19일까지 3년이다. 그는 취임식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리부트 건강보험, 인공지능(AI)으로 여는 건강복지 플랫폼”을 새로운 경영 비전으로 제시했다.
강 이사장은 “건강보험은 이제 치료를 보장하는 제도에서 건강한 삶을 설계하는 제도로 진화해야 한다”며 “병들기 전에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은 물론 건강한 노후와 돌봄까지 함께 책임지는 생애주기 건강보장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의료계·공공행정·건강보험 실무 두루 경험
강 이사장은 의사 출신이면서 의료계와 공공행정, 건강보험 실무를 두루 경험한 정책가로 꼽힌다. 건보공단에는 낯선 외부 인사가 아니다.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급여상임이사로 근무하며 보험급여와 약가, 요양급여비 관리 등 건강보험의 핵심 업무를 관장했다.
급여상임이사는 국민이 낸 보험료를 어디에, 어떤 기준으로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리다. 공단의 조직 운영과 의사결정 구조를 직접 경험했다는 점에서 취임 초기부터 빠르게 현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강 이사장은 심장혈관흉부외과 전문의로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을 졸업해 흉부외과학교실 외래교수, 혜민병원 진료부장 겸 흉부외과장 등을 지냈다. 이후 의원을 개원하면서 대학병원과 종합병원뿐 아니라 1차 의료기관의 현실도 경험했다. 대형병원과 개원가가 각각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체감한 경력은 향후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공급자 단체와의 수가협상 과정에서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공의료와의 인연은 지난 1995년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면서 시작됐다. 보건소 진료와 지역의료를 경험한 그는 임상과 개원가를 거쳐 의료정책과 행정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2016년 10월에는 경기 용인시 기흥구보건소장에 임용돼 지역 공공의료 발전에 힘을 보탰다.

건보공단을 떠난 뒤에는 공공기관 경영 경험을 쌓았다. 강 이사장은 2021년 10월 한국공공조직은행 제2대 은행장에 임명돼 인체조직의 공익적 관리와 국내 이식재 공급 안전성 확보를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현장 중심의 보건의료 정책을 만들기 위한 활동도 이어갔다. 의료계와 학계, 간호계, 제약업계 관계자 등과 한국보건의료포럼을 출범했다. 포럼은 환자 안전을 중심으로 한 보건의료자원 관리와 공공보건의료 서비스 강화, 감염병 예방·관리체계 개선 등을 주요 의제로 제시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돼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서울시당 직능위원장, 보건의료특별위원장 등을 맡으며 민주당의 보건의료 정책과 공약 수립에도 참여했다.
의사단체와 보험자, 지방행정, 공공기관에 이어 정치권까지 경험했다는 점은 강점이 될 수 있다. 다만 정치 활동 경력이 건보공단 운영의 중립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직 안팎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건보공단 노동조합(건보노조)은 성명서를 통해 “강 신임 이사장은 공단 급여상임이사를 역임한 데다 새 정부 보건의료 정책 공약 수립을 이끈 전문가로, 공단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적임자”라며 “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의 보장성 확대는 국민 복지뿐 아니라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는 정책이다”라고 밝혔다.
건강보험 지출 압박↑…지속가능성 ‘빨간불’
강 이사장은 급여상임이사 임기를 마친 지 약 5년 만에 건보공단 최고 책임자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 그가 마주한 환경은 급여상임이사로 일하던 때보다 한층 복잡해졌다. 건강보험은 국민 의료비 부담을 낮추는 핵심 사회보험이지만, 동시에 고령화와 의료 이용 증가, 신약·신의료기술 진입 등으로 지출 압박이 커지는 상황이다.
보험재정 누수 방지 등 공단이 풀어야 할 과제는 겹겹이 쌓여 있다. ‘약자 복지’를 강화하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정책 방향이 지속 가능하려면 안정적인 재정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역·필수의료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고 중증·희귀질환 보장성을 넓히며 돌봄과 간병 부담을 낮추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빨간불’이 켜진 지는 오래다.

가장 큰 부담은 고령 인구 증가다. 건강보험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지출한 진료비는 48조9011억원으로, 전체 진료비(110조8029억원)의 약 44.1%를 차지했다. 노인 1인당 연평균 진료비는 544만3000원으로, 전체 건강보험 적용 인구 1인당 연평균 진료비(215만5000원)보다 2.5배 높은 수준이다.
올해 건강보험 재정 적자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정부의 의료개혁 투자는 재정 부담을 크게 높일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건강보험 수가 구조 혁신방안’을 통해 지역 간 의료격차를 줄이고 중증·응급, 분만, 소아 등 필수의료를 강화하기 위해 건보 재정 3조6000억원을 매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작년에 이미 1조5868억원의 재원이 투입됐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의 ‘의료개혁 1·2차 실행방안을 반영한 건강보험 재정 재추계’ 보고서를 보면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지원사업에 2조1352억원, 포괄2차 종합병원 지원사업에 2046억원, 필수특화 기능 강화 지원사업에 75억원이 소요됐다.
예정처는 의료개혁 실행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투자를 반영하면 누적 준비금 소진 시점은 오는 2029년으로 2년 앞당겨지고, 향후 10년간 누적 적자액은 기준선 대비 27조8000억원 증가할 것으로 추계했다. 의료개혁 추진을 반영하지 않더라도 올해 4000억원의 건보 재정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고, 2035년 37조5000억원으로 적자 규모는 확대될 전망이다.
사무장병원 단속 ‘특사경’ 추진…의료계 반발 변수
보험료 부과체계의 형평성을 높이거나 지출 구조를 조정할 때는 가입자와 노동계, 경영계 등 이해관계자의 동의를 끌어내야 한다. 과잉 비급여와 부당청구를 관리하는 과정에선 의료계의 반발이 예상된다.

통합돌봄 정착도 공단의 핵심 과제다. 병원 진료와 요양, 일상생활 지원이 단절되지 않도록 제도를 연결하려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의료기관, 장기요양기관 사이의 역할을 정교하게 조율해야 하지만 연결고리는 약하고 인식 개선은 더딘 편이다.
복지부와 건보공단이 통합돌봄 인지도를 조사한 결과, 통합돌봄 제도 자체를 들어봤거나 알고 있다는 일반 국민은 78.3%였지만, 제도가 실제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비율은 57.1%에 그쳤다. 42.9%는 제도 시행 사실을 전혀 몰랐다. 중장년층의 제도 인지도는 82%, 시행 인지도는 62%였다. 이 조사는 전국 만 18~79세 성인 2000명과 만 40~79세 중장년층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테스트 베드’ 일산병원 역할 부상
국내 유일 보험자병원인 일산병원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도 관심이다. 건강보험 일산병원은 단순히 공단 산하의 종합병원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새로운 수가와 의료서비스, 진료체계를 실제 의료현장에 적용하고 그 효과를 검증해 건강보험 정책의 근거를 마련하는 ‘모델병원’ 역할을 맡고 있다. 공단이 추진하는 정책이 환자와 의료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시험대인 셈이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강 이사장이 취임사에서 공단을 ‘건강복지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힌 만큼, 일산병원이 정책과 사업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플랫폼 병원’ 또는 ‘테스트 베드’ 역할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산병원은 본래 건강보험 제도와 정책을 현장에서 시험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병원이어서 공단의 새로운 운영 방향과 잘 맞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공단 내부 신뢰 회복과 조직 안정도 숙제로 부상했다. 정기석 전 이사장이 임기를 한 달가량 남기고 사표를 제출하면서 공단은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정 전 이사장의 사의 표명 배경으로는 차기 이사장 임원추천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내부 반발과 청와대 특별감찰 등이 거론된다. 앞서 건보공단은 국회 국민청원게시판의 ‘담배책임법’ 입법 청원인 수를 채우기 위해 증권사 직원을 동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건보노조는 “전임 경영진 시기 현장 조직이 크게 위축됐다”면서 “새 정부 국정과제인 지속 가능한 보건의료체계 전환과 국민 의료비 부담 완화를 위해선 내부 구성원의 신뢰 회복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